교보문고에서 당나귀를 기다림
계절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광화문사거리
모든 길은 책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가 오기로 한 자리, 나무처럼 서서 기다린다
난로가 켜진 책방 안은 마른풀 냄새 가득하다
시계침은 고집 센 초식동물처럼 오후를 걸어가고
책갈피 속 해바라기들 서쪽으로 몸이 휘어진다
나는 나에게 김수영과 카프카를 뜯어 먹인다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송이들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십자가 붉게 피는 골목
벌판 저 끝에서 오고 있을 당나귀를 기다린다
불빛 한 페이지를 뜯어 그에게 편지를 쓴다
기다림에 지친 발등이 부어오른다고
내 이마에 초승달이 뜨는 중이라고
눈은 푹푹 쌓이고
눈길을 걸어 흰 당나귀**가 올 것이다
생각이 많아 천천히 걷는 그가,
온몸이 詩인 그가 올 것이다
*김수영, 「눈」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당신과 듣는 와인춤
오른손 검지는 가장 깊은 음역의 詩다
그가 그녀 '파' 건반을 지그시 누른다
잠들었던 바다가 천천히 눈을 뜬다
바닷속엔 그가 연주하다 만 그녀 음색들이 산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물의 건반들이 하나씩 일어선다
한 옥타브 두 옥타브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한다
그가 그녀 내면 깊숙이 숨을 불어넣는다
잃어버린 말들이 발꿈치를 들고 스텝을 밟는다
무수한 밀어들이 숨어 있던 기억들을 조율한다
심해에 잠들었던 물고기들이 군무를 춘다
갇혔던 말들이 파! 숨비소리를 내며 물 밖으로 솟구친다
내 손엔 수만 개의 금맥이 산다
우리는 서로의 손끝에서 우주를 왕래한다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외 2편)
20여 년 나와 함께한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이사하는 날 담장 밖에 내다놓았다
마음이 아려 잠이 오지 않았다
소나기 내린 다음날, 밤새 젖었을 텐데
얼룩은커녕 한층 투명한 얼굴이다
물방울 속 이야기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광을 즐긴다
물방울 속 어떤 얼굴은 가시처럼 보이고
어떤 놈은 공작새의 날개, 다이아몬드, 조약돌, 화살표
때로는 행진하는 군인처럼, 매미 떼로
또 어떤 날은 꽃밭으로 읽혔다
골목을 몰아가는 물의 도화선으로 보이다가
내 피를 몰아가는 피톨처럼 읽히다가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방울을 거울삼아 들여다볼 때가 많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물방울이 매단 이야기들
내 영혼을 담은 자화상이 아닌가
햇살과 구름, 건너편 창문과 지붕들
지중해 바다를 품고 출렁인다
이 그림을 위해 화가는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으려 했을까
그도 난간에 매달린 채 운 적 많았을 것이다
소중한 줄 모르고 버리려 했던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그가 있어 내 미래가 밝음을 깨닫는다
*김창열 화백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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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남 / 1967년 경북 안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냄비 속의 여자」 당선. 2018년 「방아쇠수지증후군」 외 2편으로 제26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현재 《포엠피플》 편집위원.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