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자루
쌀자루가 현관에 무겁게 앉아 있다
지난 가을 허씨가 소작료로 두 가마 부쳐온 것이다 한 가마는 동생들 주고 반 가마는 처가에 나눠줄 셈이다
쌀이 나온 논을 떠올려본다
아버지의 아버지, 먼먼 아버지 때부터 있어온 서 마지기 논, 소년가장 되어 봉지 쌀 사면서도 팔 수 없었던 논
그 논의 가랑이가 쏟아낸 쌀의 양을 짐작해본다
쌀이란 도대체 무언가
경상도 남자인 나의 발음은 쌀이 곧 살이다 허긴 쌀은 논을 물려준 아버지의 살이기도 하다
아니다, 이것은 너무 진부한 생각
쌀을 새삼 떠올려본다
손벽처럼 쏟아지는 희디흰 빛 알갱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 기교적이다
껍질에 싸인 볍씨를 그려본다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한해살이풀인 벼는 동인도가 원산지다
아니다, 벼는 늪에서 나왔다
경상도는 1억년 전 호수와 늪이었다
우리집 앞산에는 중생대 백악기의 발가락 세 개인 공룡이 살았다
공룡이 마셨던 물, 양치식물이 숨쉰 공기 지금 내가 마시고 들이쉰다 그때는
가오리가 날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서 마지기 논에서 나온 쌀 먹고 시집간 고모는
치매를 앓다가 지난해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사십 년 전에, 아버지는 오십 년 전에 가셨다
내년에도 쌀은 올 것이다
공룡이 죽고 내 숨이 끊어져도 쌀은 날아올 것이다
설마 기러기처럼 논이 날아가기야 하겠는가
__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문학동네시인선 036, 2013년

장옥관(張沃錧)
1987년 계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시집『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와 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시창작론 『유쾌한 시학 강의』(공저), 시 해설서 『현대시 새겨 읽기』 등.
제15회 김달진문학상, 제3회 일연문학상, 제14회 노작문학상, 제27회 금복문화예술상, 제6회 김종삼 시문학상, 제5회 이용악문학상 등 수상. 시집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07 올해의 시’에 선정됨.
2005년부터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3월에 정년퇴임했고, 현재 계명대 시민대학에서 시창작 세미나를 운영하고 있음. 해외활동으로는 2024년 4월 영국의 문예플랫폼인 '아심토트(Asymptote)'에 작품을 발표했고, 2025년 3월에 Diálogos(USA) 출판사에서 시집을 발간할 예정임.
참고 :
(https://www.asymptotejournal.com/poetry/three-poems-jang-okgwan)
(https://www.lavenderink.org/site/?v=76cb0a18730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