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니 벌써 유행이 지나갔을까요?-- 한국에선 온통 레트로 열풍이라는데요.
시의 세상에서 돌아본 1980년대는
저항과 절실함, 처절함, 그리고 찌들도록 가난함이
먼지를 덮어쓰고도 이글이글 살아있네요.
시 선정은 주원규 목사의 팟캐스트 '문학의 신' 2017년 5월 4일 에피소드 26. 을 참고했습니다.
미싱사의 노래
김해자
나는 평화시장의 일급 미싱사
손이 안 보이도록 옷을 만들지
서울 시내 와이셔츠 십분의 일은
이 손으로 만들었지 나는 미싱사
이 바닥에서 구른지 벌써 칠년 째
나는 미싱사 옷을 만들지
이 옷을 누가 입을까 나는 관심 없어
죽어라 뺑이치며 미싱만 밟을 뿐
이 옷이 얼마에 팔리까 나는 몰라
하루 빨리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빡빡한 미싱에 기름칠 하고 벨트도 좋이고
장딴지에 힘주어 쉴 새 없이 발판을 밟아대지
졸린 눈 부릅뜨고 한 땀 한 땀 신경을 곤두세워
에리와 소매와 몸통을 이어 옷을 밀어내지
밀려드는 잠 쫓으려 타이밍을 먹고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옷을 만들지
미싱을 타는 지금은 철야 이틀째
미싱을 타는 지금은 철야 이틀째
고바우집 소금구이
김선우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꺼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
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
훤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 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 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
_김선우, 『내 혀가 내 잎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2000, 89쪽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침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출처] 함민복의 <서울역 그 식당>|작성자 이병렬
서울 예수/ 유종순
산동네 공터에서
매일 밤 그이는 바라본다
하루의 땀과 피곤을 씻는 수도물소리와
싸움박질 소리와 욕소리와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울음소리와
가난보다 더 독한 소주에 검붉게 달아오른
한 무리 야근 행렬들의 거친 목소리들이
산동네 공터로 정답게 몰려들 때
그이는 바라본다 가깝고도 먼
산 아래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요사스럽게 돌아오르는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복과 천국을 향한 정신질환의
기도와 노랫소리가 넘쳐흐르고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진리도 덩달아
입안에서만 달콤하게 넘쳐흐르고
넘쳐흐르는 열기만큼 쌓이는 지폐 다발에 미쳐
밤이면 밤마다 붉은 혀 날름거리며 돋아오르는
수천 수만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그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찌든 얼굴들은
허울좋은 도시계획에 밀려 이렇게
산꼭대기로 쫓겨와 한숨보따리를 풀어놓고
이젠 그이마저도
거칠고 무거웠지만 투명했던 삶의 십자가를 빼앗긴채
부드럽고 매끄럽고 향기로운 티크나무 십자가에
이탈리아산 대리석 인테리어에
금도금 은도금 보석장식 장신구에 곤충 표본처럼 박혀
결코 살아날 수 없는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데
저 십자가 뾰족지붕 아래에선 하루 종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고만을 가르칠 뿐
이 척박한 땅 팍팍한 삶 속에서 어떻게
지 애비와 에미가 사랑으로 만나 어떻게
자기를 낳아 키웠는지 가르치질 않는다
간혹
동정과 재미와 사교와 심심풀이의 그럴 듯한 사랑으로
이곳 산동네까지 헌옷가지와 라면상자를 들고 올라와
단 5분 동안 가슴 아파하다가 돌아갈 뿐이다
산동네 공터에서
그이는 그 모두를 바라본다
멀기만 한 도시의 불빛과
쉬지 않고 붉은 혀 날름거리는 네온의 십자가와
그것들이 이루어놓은
위선과 거짓과 타락과 기만의 휘황찬란한 그 모든 삶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절망뿐인 그 모두를
그이는 매일 밤 바라본다
(인터넷 출처:https://praxislife.tistory.com)
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등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출처: https://poetryreader.tistory.com/entry/서울의-예수-정호승 [시 읽어주는 남자: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