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에 수록된 시편들 중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선택하여 올립니다. 시집을 갖고 계시지 않은 분들은 4월 16일에 있을 박소란 시인의 특강을 기다리며, 작가를 알아가는 방편으로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시집을 갖고 계신 분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시는 다른 시가 있다면 올려주세요. 함께 읽어 보고 싶습니다.
노래는 아무것도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채 실려간다
한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려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검정 비닐봉지 하나 담장 너머로 펄렁
날아갈 때 텅 빈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로
자꾸만 저기로 향하려 할 때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아
이리 온,
한번쯤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뜻 모를 젖은 손이 가슴을 두드리는 새벽
슬픔을 입에 문 젖내기처럼 골목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주지 않을래?
집집마다의 비극을 모조리 깨워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
꼬리가 잘린 채 버려진 것들의 잔치를
그러니 이리 온,
나의 고양이야
사나운 발자국이 겁주듯 찾아든 아침
우연히 바닥에 뭉개진 비닐봉지를 맞닥뜨린 행인이 아아악!
비명을 지를 때, 정말이지 비닐봉지가
밤사이 웅크려 죽은 한마리 고양이로 보일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피를 닦고 일어나 다시
저기로 잠잠히 멀어져갈
나의 마음아
제발 이리 온
없다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길들여지지 못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깊고 어두운 곳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은
이곳에 주소가 없다는 것을
집이 없다는 것을
상기된 표정으로 커튼을 열어젖히는 얼굴이
발갛게 피어나는 식탁이 풋잠을 머금은 나릿한 하품이
없다는 것을
아침은 이미 이곳으로 오는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밤의 우체통을 들여다본다
주린 속 깊숙이 손을 찔러본다
짐승은 파르르 떠는
또다른 짐승의 야윈 손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짓궃은 장난 같은 차가운
피, 피가 흐르고
당신은 어떻게 알았을까
울음이 없다는 것을
컹컹 짖는 법을 나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오랜 침묵의 우체부인 당신은 어떻게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참외를 깎을 때
참외를 깍는다 샛노랗게 익은 웃음을
커다란 접시에 가지런히 담는다
그녀의 꽃무늬 앞치마를 싱싱한 참외를 사람들이 칭찬한다
어쩌다 접시 가장자리에 묻은 머리카락을 재빨리 훔쳐내는
그녀, 힘주어 쥔 과도가 낯설게 반짝인다
유독 손목이 가는 그녀는
얼마 전 다녀왔다는 후지 산 기슭 아오끼가하라를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풍광 속 시간을 잊은 산처럼 머물고 싶었다는 이야기
그녀의 낮고 고운 목소리를 칭찬한다 누군가 불쑥
근처 죽음의 숲에 대한 풍문을 꺼내고
그녀는 웃는다 웃음은 더욱 노란 빛을 띠며 접시에 담긴다
사람들이 그것을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린다
노랑이 거실 곳곳에 진동한다 노랑이
머문 테이블 위 드문드문 음산한 얼룩
숲의 가장 이슥한 곳 새겨진 어떤 발자국같은
가늠할 수 없는 정적이 흐른다
그녀는 웃는다 단물이 고인 참외를 재차 권하며
울울한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참외를 깎는다
참외의 기다란 허물이 수북이 쌓인다
작고 심약한 날벌레가 그 속에 들어 몰래 우는 것을
진득거리는 손을 닦으며 나는 조용히 바라본다
노인
집 앞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밥상
칠이 벗겨진 흉곽 위로 굵은 빗방울 떨어진다
달그락대는 비의 수저 소리에 나는 괜스레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채 삼키지 못한 저녁이라도 있는 건지
한평생 밥만 먹다
고스란히 세월을 물린 고집 센 노인네처럼
뒤늦게 병상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도 없으니, 군기침하며 돌아눕는 뒤통수처럼
밥상은
언제 벌써 이가 몽창 빠진 채로 쓰게 웃고
주린 낯으로 종종거리며 곁을 지나는 내게
부러 더 세게 힘을 주어 뱃가죽을 틀어쥐는 나약한 손에게
신수를 훤히 꿰뚫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백수(白首)의 점쟁이처럼
밥상은 말한다 낮고 너른 음성으로
흠씬 젖은 걸음을 붙든다
그만 이리 와 한술 뜨시게
그래 봐야 결국엔 모두 낡고 만다네

다음에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엔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주소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대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기침을 하며 떠도는 귀신이
시퍼런 생댓잎에 옮아앉는 싸락눈, 신법사 앞을 지날 때
젊은 박수가 중얼거리는 소리
이년 박복한 년 머잖아 네년 몸에 신이 붙겠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떠도는 귀신이
반쯤 허물어진 포장마차에 들었지 집으로 가는 길
뜨끈한 정종을 마셨지
입천장이 벗겨져 산발한 여인네처럼 흐느적거릴 때
이년 박복한 년
금 간 담장 위 도둑고양이 한마리
제 흉한 점괘를 엿듣고 있었지 기다란 꼬리를 곤두세운 채
더운 숨이 빠져나간 부뚜막을 오래 바라보듯
눈물점도 오지게 짙은 년 쯧쯧 쯧쯧
눈이 마주치자 내 쪽으로 번쩍, 사나운
길을 할퀴는 고양이
빈 잔을 앞에 놓고 한참을 주억거렸지
늘 몇방울의 피가 흩뿌려져 있던 길에 대해 생각했지
어느 틈엔가 쫓아와 등짝을 때리는 바람
이년 박복한 년
얼근히 취한 얼굴로 방울을 흔드는 게 바들거리며 작두를 타는 게
우스꽝스러워 나도 모르게 피식
비어지는 웃음을 앞세워 서둘러 값을 치르고 돌아서려 할 때
그래 이년아 웃어라 웃다보면 차라리 웃다보면
잔은 또 그렇게 차오를 테지
댓잎에 빙의된 바람도 자리를 찾아 고된 몸살을 다독일 테지
캄캄한 자취방에 돌아와 알았지
여태 내가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잤다는 것을
머잖아 네년 몸에 신이 붙겠다 아야 아야 아파 우는 귀신이
잠을 이루지 못했지 무서워서
겁 없이 어둠속으로 걸어간 고양이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
콜록콜록 밤새 자꾸만 헛기침이 돌았지
나프탈랜
멀어지는 일 옷장에서
신발장에서 불안이 눅눅히 번진
이 방에서 도시에서
끝내 무표정한 얼굴로
지상의 외딴 그늘에 숨어
두꺼운 한권 책을 읽는 일
어떤 사소한 이야기도 시작되지 않는 책
우연처럼 찢겨나간 페이지에 이르러
잠시 웃음을 머금는 일
울음이 다 닳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안녕을 연습하는 일
더듬더듬
뜻 모를 문장들을 앓다보면
자꾸 벌레에 물리고 벌레는 나를 사랑해,
사랑해 말하면
모두들 슬그머니 달아나
끝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
내가 만든 이별의 냄새를
내가 맡는 일
잠시
쓰디쓴 웃음을 머금는 일

눈곱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의 눈곱
후미진 곳 자그맣게 돋아난 한포기 이끼 같은 것
이 어두운 것을 꽃이라 하자 우리 긴긴 그늘을 빼닮은 이름을 붙여
아무도 부르지 않는
그 속에 숨어 천천히 병들고 싶었지
영영 차도를 모르는 나의 병 영원의 병
어느날 희고 아름다운 손가락 하나 눈가로 향했을 때 슬며시 눈가에 끼인 것을 훔쳐냈을 때
잠시 거울을 보고 온다 하던 당신은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두번 다시 어떤 슬픔도 돋아나지 않아
오래도록 화분에 물을 주었지
한번 들이켜면 장님이 된다는 물 영원의 물
조화(造花)라 새겨진 팻말을 나는 본 적이 없었지
새
열어둔 사무실 창으로
바람이 분다 어느 그윽한 입술이 부려놓은 귓속말처럼
여린 살갗을 간질이는 바람, 책상 위
흰 서류 몇장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른다
일없이 공중을 두어바퀴 돌아
키보드 위 사뿐히 내려앉는가 싶더니 금세
찬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무른 깃털이 한움큼은 뽑혔으리
종이는 원래 새였다는 사실을 어렵게
어렵게 기억해낸다
나도 한마리 새끼 꿩이었는데
가을이면 찔레 열매를 뜯어 먹고 볕이 들어찬 가지 끝에 걸터앉아 끄덕끄덕 졸곤 했는데
커다른 모니터 너머 펼쳐지는 울창한 숲, 아아
갑자기 번쩍 컴퓨터 전원이 켜진다
시들기 직전의 잎사귀 몇 지절거리며 불러낸 마술일까 더 없이 낡고 촌스러운
초로의 마술사여
부디 너의 모자 속으로 나를 데려가다오
거기 아무도 찾지 않는 귀퉁이에 푸수수
작고 작은 둥지를 틀고 싶다
시 올려주셔 감사합니다. 마음이 싸하며 아파오네요. 서울의 한 공원에서 “길고양이 학대는 범죄입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마음이 먹먹했던 순간도 떠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