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시인의 시 몇 편 올립니다.
클래식이라고 봐야겠죠?
옛날 레코드판으로 추억의 명반 음악을 찾아 듣는 느낌도 나고요...😅
얼굴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내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한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페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시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크고 검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빡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갸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갸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______________[바늘 속의 폭풍] (문학과 지성사, 1994)
꼽추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 뿐이었다
가끔 등뼈 안에 숨어 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 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더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_____________[태아의 잠] (문학과 지성사, 1991)
개는 어디에 있나
김기택
아침에 들렸던 개 짖는 소리가
밤깊은 지금까지 들린다
아파트 단지 모든 길과 계단을
숨도 안 쉬고 내달릴 것 같은 힘으로
종일 안 먹고 안 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슬픔으로
울음을 가둔 벽을 들이받고 있다
아파트 창문은 촘촘하고 다닥다닥해서
그 창문이 그 창문 같아서
어저께도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주민들 같아서
울음이 귓구멍마다 다 돌아다녀도
개는 들키지 않는다
창문은 많아도 사람은 안 보이는 곳
잊어버린 도어록 번호 같은 벽이
사람들을 꼭꼭 숨기고 열어주지 않는 곳
짖어대는 개는 어느 집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개 주인은 없고
짖는 소리만 혼자 이 집에서 뛰쳐나와
저 집에서 부딪히고 있다
벽 안에 숨어 있던 희고 궁금한 얼굴들이
베란다에 나와 갸웃하는데
어디서 삼삼오오가 나타나 수군거리는데
흥분한 목소리는 경비와 다투는데
울음소리만 혼자 미쳐 날뛰게 놔두고
아파트 모든 벽들이 대신 울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
----------시집 [낫이라는 칼](문학과 지성, 2022)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힘
다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뛰는 강아지
눈이 있는지도 모르고 쳐다보는 강아지
꼬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흔드는 강아지
아직 이빨이 되지 않은 이빨은 순하고
아직 발톱이 되지 않은 발톱은 간지럽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
멀리서 나무들도 덩달아 가지를 흔든다
머리에서 나무로 이어진 긴 등뼈가 보일 것 같다
뛰고 흔들고 달려드는 힘들이 솟아나
산에는 나무들이 가득하다
발톱 달린 뿌리들이 땅속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와 꼬리 사이 머리와 산 강 하늘 사이
등뼈들이 돌아다니는 모든 길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꼬리뼈를 흔든다
하늘이 와서 강아지 눈을 닦아준다
나뭇잎 바람이 와서 표정을 간질여 준다
햇살이 와서 발바닥을 드높이 올려준다
______계간 [시인수첩](2020 가을호)
출처-https://rnmountain.tistory.com/ 에서
2014년 가을, 김기택 시인의 시 「직선과 원」을 읽고 펑펑 운 뒤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랫만에 김기택 시인의 글을 다시 읽게 해 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