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예찬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걸을수록 나 자신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체중 조절, 심장 기능 강화
사색, 스트레스 해소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걷기란 갖다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는 만 오천 보 정도 이동해서
한강공원에 나를 유기했다
누군가 목격하기 전에
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
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젼다
머리는 퐁당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붙어 있었고
나는 잔소리에 시달려서 한숨도 못 잤다
걷기란 나를 한 발짝씩
떠밀고 들어가서 죽이는 것이다
여럿이 함께 걸을 때도 있었다
나와 함께 걷던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더 가까워지리란 믿음이 있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걷기를 예찬했다
그런 날에는 밤 산책을 나가서
더 멀리 더 오래 혼자 걸었다
행복
행복하니까 할 이야기가 없다
밥을 굶어도 좋다
오늘 뭐 먹었어?
뭐 하고 있어?
네가 물으면 떠오르는 게 없는데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다
꿈에서 은사님을 만났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 따귀를 때렸다
(거기서 행복하시냐는 말로 들은 걸까)
살아 계실 때 선생님이 그랬다
시인은 불행하다고
그림자가 없다고
꿈에서 맞은 매는 아직 얼얼한데
사랑이나 마음 같은 단어들은
강화도 펜션에서 보이는 나라처럼 멀고
나는 불판의 연기가
그쪽으로 날아가는 게 미안해서
평소보다 허겁지겁 고기를 먹으며
북쪽의 조그만 마을을
안개가 가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났다
내려놓을 말이 없다
밀고 나가서 쓸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불행은 내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너는 과거에도 그랬다고
타이르는데
행복해서
남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선
축구 경기장에 갔을 때
공이 라인을 넘어갔는지
안 넘어갔는지를 두고
싸우는 선수들을 봤다
그러니 선을 넘는 것과
지키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누군가는 뛰어넘으라고 한다
누군가는 멀어지라고 말한다
어른이 되니까 알겠다
좋은 어른은 돌아가셨다는 걸
만약 선이 고무줄이라면
새로 사거나 잘라버려도 될 텐데
선을 밟았다고 대역죄인처럼
울지 않아도 될 텐데
존경하던 분에게 정도껏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 사람에게 미움을 샀지만
여전히 노래하는 이들과
리듬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이
고개 너머에 있는 것을 보았다
막차를 기다리는데
연인이 실랑이를 한다
선을 넘을지 말지 그들의 문제일 뿐
버스에 올라서 창밖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한 획 두 획
정성껏 쏟아지고 있었다
축시쓰기
결혼을 앞둔 친구가
시를 부탁했다
지금까지 쓴 모든 축시는
내 신부에게만 읽어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써야 두 사람 마음에 들까
어둡고 쓸쓸한 내용뿐
게으른 시인을 위하여
축시 마감을
한 주만 미룰 순 없겠지?
새로 쓴 걸 보고 있다
새벽에 보니 재난문자 같다
아침을 길어 와도 소용없다
새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에선
번번히 실패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입학과 동시에 졸업이 걱정되던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좋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해서
붙잡고 있는 팔이 아프다
시 쓰기란 무엇인가
축시적 표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면사포를 써야
상냥한 말이 떠오를 것 같다
햇빛
바다에
빠지는 꿈
바다에
빠지는 꿈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파도 같은 꿈
꿈이 물속으로 나를 떠밀어
수심이 깊어질 때면
쌍무지개 휘어지도록
붙잡아주는 이가 있었다
**
저는 <선>이란 시가 좋았어요.
일기처럼, 말이 서툰 사람의 이야기처럼 만들어지는 한 편의 시들이
읽고나면 그늘진 자리가 더욱 서늘해져서
햇빛 내리는 쪽으로 가는 마음이 되려 애처로워서
좋았어요☺️
읽으시는 분들도 흠, 좋네!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24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에 수록된 작품 일부입니다.
*참고로 2024년 수상자는 김복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