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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춘추] 단단한 뿌리


김인식 시인


온 동네에 단풍이 눈부시던 지난해 11월, 나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느 계절이든 내 나라 방문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떠나기 전, 장을 보러 가지 않고 냉장고와 냉동고의 재료들로 밥상을 차렸다. 남편은 외부로 연결된 수도꼭지를 잠그고 어린 무화과나무와 감나무 뿌리 근처에 낙엽을 덮어주었다. 잔디를 관리하는 호세에게 낙엽 정리도 부탁해 놓고, 수도국에는 예치금을 넣어 두었다.



열다섯 시간의 비행이 조금 힘들었지만, 공항에 내리는 순간 텁텁한 공기까지 살가운 내 나라다. 해 질 녘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언니와 형부는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간장게장엔 흰밥이지."



형부는 직접 밥을 푸고, 언니는 게딱지를 열어 노을빛 살을 접시에 내놓았다. 잘 익은 김장김치와 새곰한 파김치, 톡 쏘는 홍어무침까지. 반가운 마음이 함께 버무려진 최고의 식사였다. 미국에 살면서 김치와 된장, 고추장까지 직접 담가 먹고 있지만, 언니의 손맛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다음 날, 산책을 할 겸 수선할 옷과 구두를 챙겨 들고 나갔다. 담장마다 홍시가 꽃등처럼 달려 있는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마트 건너편 수정세탁소로 갔다. 거대한 기계음과 수많은 옷이 자동으로 오르내리는 미국의 세탁소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규모지만, 정갈한 분위기는 반짇고리가 있던 할머니의 방을 떠오르게 한다. 꼼꼼하고 자상한 사장님은 짧은 대화로도 내 뜻을 다 알아차렸다. 수선할 옷을 보여드리자 미소 띤 얼굴을 두어 번 끄덕였다. 다음 날이면 말끔히 수선된 옷을 반듯하게 다림질까지 해놓으실 터였다.


큰길로 나와 버스 한 정거장쯤 걸어가면 골목길 입구에 작은 구둣방이 있다. 높은 주상복합 건물의 금속성 그림자가 구둣방과 그 옆의 납작한 지붕들을 차갑게 움켜쥐고 있었다. 시차로 무뎌진 내 발이 문턱을 넘는 순간, 바짝 마른 공기와 함께 본드 냄새가 훅- 달려든다. 일 년만큼 엷어진 문신눈썹이 살짝 올라가며 반긴다. 얕은 선반 위 가죽 조각들이 낡은 시집처럼 쌓여 있다. 벽에 빼곡히 걸린 신발본과 끈들은 마땅한 문장을 애태우며 기다리는 시인의 마른 손가락을 닮았다. 구둣방에 스며 있는 오래된 냄새를 슬며시 밀어놓고 가져온 구두를 그에게 건넸다.



세상에 서 있는 일이 불안해서일까. 내 발의 볼이 점점 넓어진다. 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구두의 발등과 바닥을 분리했다. 그리고 시접 부분의 가죽을 잘 펴서 볼을 넓혀주었다. 낡은 바닥을 갈고 굽을 다듬었다.



구두가 다시 태어나는 동안 나도 조용히 수선을 받고 있는 듯했다. 내 안의 오래된 무늬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상한 부분을 하나씩 갈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끔 북향의 찬 기운이 수선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하지만 낡은 것들이 마주한 겨울바람은 오히려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주는 것 같았다. "좋은 가죽이라 몇 년은 더 신을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은 빛바랜 노트를 다시 펼쳐 보듯, 내 발끝으로 밟아온 시간들을 되짚어 보게 해주었다.


좁은 골목 어귀에서 자신의 재능을 묵묵히 갈고닦으며 성실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깊고도 단단한 뿌리였다.



[김인식 시인]


https://m.mk.co.kr/news/contributors/1134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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