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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시]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외 3편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탱자처럼 올라붙은 불알 가진 수캐가 아닙니다 꽃핀 암캐 항문이나 쫓는 수캐가 아닙니다

갓 피어난 채송화 꽃밭 휘저으며 나비를 쫓다가도

눈동자에 뭉게구름을 담아냈지요


비록 늘 굶주렸지만, 이웃의 후한 대접에는

밭고랑에 숨은 생쥐 잡아 현관에 갖다놓는 염치도 있었어요

장맛비에 허적이며 온 동네를 쏘다니는 그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앞산 능선이 완만한 것은 개의 등이 굽었기 때문이며 그의 등이 굽은 것은 사무침 때문입니다


탱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이불 홑청 빨다가 구름에 손등을 깨물린 날

마을 뒷산 오르는 이웃들 따라 올라가 영영 내려오지 않았어요

주머니의 든 돈과 입은 옷으로 대문 나서서

몇 년째 돌아오지 않는 제 주인처럼

사무침이 구름을 피우고 사무침이 방금 다렸던 와이셔츠를 다시 다리게 만듭니다


한번 흩어진 구름은 왜 다시 뭉쳐지지 않을까요 한번 지나간 물소리는 왜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요

푸른 가시마다 총총한 흰 꽃

탱자 울타리에 탱자가 올해에도 걸어와 매달리는데






죽음에 뚫린 구멍


벌초 간 어머니 묘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검게 아가리 벌린 그 구멍은 죽음에 뚫은 문, 산토끼의 집이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 제 집을 판 것일까 젖가슴처럼 봉곳한 봉분을 파고들며 토끼는 아찔하게 검은 젖을 빨았을까 구멍을 드나든다고 죽음이 달라진다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 어머니 다시 돌아오시는 건 더욱 아니겠지만, 죽음과 삶이 한통속, 바람벽에 달아놓은 거울처럼 구멍이 갑자기 환하다 입구에는 누군가 기다리다 돌아간 듯 잔디가 동그랗게 눌려 있다





호수


그 귀는 수평이다 너무 큰 귓바퀴다


뭉쳐졌다 풀리는 구름의 뒤척임을 듣는다 여뀌풀씨 터지는 소리를 삼킨다 미끄러지는 물뱀의 간지럼도 새긴다


소리의 무덤이다 콩죽 끓듯 빠져드는 빗방울 깨물며 소리를 쟁인다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걸 본다 잎새들 입술 비비는 소리가 나이테를 그리듯


모로 누워 베개에 귀 붙이면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 쉰 해 동안 내 몸으로 빠져든 온갖 소리들 속삭이는 소리 숨 몰아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들여다보면 소리들 삭아 부글거리는 검은 뻘


호수가 얼음 문 닫아걸듯 나 적막에 들면, 빠져든 소리들은 다 어디로 새어나갈까 받아먹은 소리 다 내뱉으면 그게 죽음일까 들이마신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듯이





단지(斷指)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왼손 네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하필이면 그 손가락이고 그 마디일까

네번째 손가락은 무명지(無名指)

엄지 검지 중지 소지 뒷전에서 끝내 이름 얻지 못한 손가락

양손 서른 마디 가운데 가장

쓸모없는 한 마디


12남 9녀 스물하나 중 셋째로 태어나

평생 골방에서 금붕어만 그리다

독 묻은 손가락 물고 요절한 시인*

대구 부호이며 중추원 참의인 아버지의 눈에는 다섯 살에 어미 잃어 젖배 곯은 아들, 시 나부랭이나 쓰는 아들이 무명지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쓸모만 쓸모 있는 이 땅에 시인은

쓸모없는 무명지

그러나 약속 구부려 빚은 약혼반지는 그 손가락에 끼운다네 로마신화에도 있다지

그 손가락 심장에 곧바로 이어져 있다고,


무용(無用)의 무명지로 꾹꾹 눌러 쓰는 시


죽은 몸에 지금 돋는다

눈엽(嫩葉)으로 눈뜨는 초록의 시




*이장희(1902~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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