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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순이

 

  봄바람이 꽃잎을 날리며 유혹한다. 집 근처 호숫가로 산책하러 나갔다. 내가 살고 있는 메릴랜드 지역 동네 주변에 둘레 1.5km 정도 되는 리오 호수(Lake Rio)가 있다. 봄이면 호수 둘레길은 봉긋봉긋 피어나는 꽃과 푸릇푸릇한 나무들로 예쁜 정원 같다. 이곳은 항상 많은 사람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나도 요즈음 1주일에 3~4일을 1시간씩 걷고 있다. 오전에 갈 때도 있지만 주로 이른 저녁 식사 후 나가서 걷는다. 마치 그린 카펫을 깔아 놓은 듯한 잔디 주위로는 숲을 이룬 나무들이 선물해 준 공기가 상쾌하다.

  이곳에 미주의 사람들이 캐나디안 구스Canadian goose라고 부르는 기러기들이 살고 있다. 갓 깨어난 새끼들이 열 지어 앞뒤로 엄마 아빠 보호를 받으며 유유히 물 위를 헤엄쳐 가는 모습이 앙증맞다. 노니는 기러기 가족은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다. 호숫가 길옆 잔디에서 둘씩 짝지어 “기악 끼아악” 대며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옆에 가도 전혀 겁내지 않는다. 궁둥이를 뒤뚱뒤뚱거리며 옆으로 비켜 가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겉보기에는 암수를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로 깃털의 문양이 똑같다. 암수뿐 아니라 모든 구스의 겉모양이 똑같다. 어떻게 서로를 구별하는지 새끼들은 다른 가족과 어울려 놀다가도 제 어미를 찾아간다. 기러기는 겨울 철새라서 겨울에 내려왔다가 봄에 북쪽 캐나다로 돌아간다. 따뜻한 어느 날 무리가 모이기 시작해서 한 무리가 훌쩍 높이 떠오르면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 기러기들은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여기에 터 잡고 살고 있다.

 

  초봄이 되면 서로 짝을 찾고 지키느라 정신이 없다. 한 쌍을 이룬 구스 부부에게 다른 수컷이 접근하면 목을 낮춰 길게 빼고 혀까지 뽑고 날며 싸운다. 닭싸움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대부분은 침입자가 쫓겨난다.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키려는 수컷의 부리에 쪼이거나 깃털이 몇 개 뽑히기도 한다. 일부일처제인 이 새들은 부부애가 그만큼 돈독하다. 부부 중 한 마리가 죽으면 평생 혼자 지낸다고 한다. 수명은 40~50년으로 알려져 있다. 새끼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하면 사람들에게도 덤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조차도 몸무게 3~4kg의 구스가 혀를 빼물고 달려들면 기겁한다. 하지만 먹이를 주는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걷는 중이었다. 구스 병아리 한 마리가 둘레길을 따라 우리를 앞질러 황급히 지나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보행로를 혼자 “비악삐악” 대며 부들부들 떨면서 갔다. 엄마 아빠를 잃어버리고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앞서 걷던 아저씨가 위험해 보였는지 병아리를 움켜잡고 두리번거렸다. 엄마 아빠 구스나 병아리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 일을 어쩌지. 남편이 어미를 찾아주겠다며 옮겨 받아서 걷던 길을 되돌아갔지만, 구스들은 대부분 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스들이 모여 사는 물 위에 병아리를 놓아주었다. 어미를 찾아 정신없이 헤엄쳐 다니다가 물 위의 자그마한 인공섬에 새끼가 없는 구스 부부에게로 헤엄쳐 갔다.

  

  이웃 아줌마 깃털 밑으로 숨어들었는지 어둠이 깔리며 새끼가 보이지 않았다. 그 구스가 잘 보호해 줄는지 모르지만 무사하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떤 때는 구스 네 마리가 두 가족 새끼를 함께 돌볼 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성이 상당히 있는 새들이라 여겨져 걱정은 덜 된다. 어쩌다가 엄마를 놓쳤을까! 마음이 짠하다. 이 호수에 살고 있으니, 날이 밝으면 엄마를 만날 수 있겠지.

   이곳은 골프장이었던 곳이라 길이가 짧은 풀들이 많다. 그 작은 풀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새들이다. 어엿이 야생 조류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붙어 있지만, 반대편에는 물고기 먹이 자판기가 있어 산책하는 사람들은 먹이를 사서 준다. 그 먹이를 거의 구스들이 먹는다. 애써 먹거리를 찾지 않아도 풍족히 먹을 수 있다. 해치는 사람도 없다. 건물 옆 호수는 영하의 날씨가 이어져도 잘 얼지 않아 구스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지 오래다. 철새도 어느새 편해진 세상에 물들면 고향도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캐나다 기러기가 이곳에 자리 잡아 텃새인 양 새끼를 기르며 잘 살고 있다. 그 모습 속에서 이민 와 언젠가 내 나라 한국으로 돌아가리란 마음을 뒤로하고 살아가는 내 모습이 투영되어 온다. 이곳에서 태어나 북쪽으로 돌아가 보지 않은 캐나다 기러기들은 이곳이 분명 고향인 줄 알고 살아갈 것이다. 3살 때 한국에서 낳아 데리고 온 큰아들과 여기서 나고 자란 둘째 아들도 이곳이 조국인 것처럼 잘 살아가고 있다. 고맙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두 아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잊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오늘도 호숫가 길옆 잔디 위엔 이민 온 캐나다 기러기 가족이 “기악 끼아악” 대며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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