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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3월 25일

처음 미국에 와서 맛 본 멜론 (cantaloupe, honeydew)은 환상의 맛이었다. 당시 1970년대 한국에는 이런 과일이 재배되지 않아서 멜론의  과하지 않게 달콤하고 아삭아삭한 식감과 낯설고 화려한 색깔의 여러 과일들이 나를 날마다 가게로 이끌었다.  주로 식품가게에서 새로운 과일과 야채의 이름을 영어 단어로 암기하던 시기였기에 이런 새로운 과일에 대한 호기심은 영어공부를 위한 동기유발도 되었다. 그 사이  미국에서 판매되는 과일을 두루두루 맛 보았고 점차 그 맛에 익숙해 졌지만 그 중 아직까지 유독 내 입 맛과 친해지지 않는 과일이 있다.  갸름하면서 길쭉한 미국 배(anjou, bosoc, bartlett등)는 모양과 크기도 눈에 익지 않고 한 입 물면 물컹하고 단 맛이 너무 강하다. 한국배가 주는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 퍼지는 상큼함과 사근사근함은 고사하고 은근한 달콤함이 없다. 한국배 맛이 그리운 나는 여기저기 화목원을 찾아다니며 아시안 배라고 쪽지를 달고 있는 묘목을 사와 뒷마당에 심은 지 거의 10여 년이 되었다.


 배나무는 매년 4,5월쯤 수수하지만 고상한 하얀색의 꽃을 피워 주위에 있는 연분홍의 꽃들과 조화를 이룬다. 심은 지 3년 후부터는 갓난아기 주먹만 한 배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시안 배라고 했으니 크기는 작지만 한국배 맛이 날거라 기대하며 입 안은 달콤한 맛에 촉촉해지고 마음은 행복해진다. 그러나 수확의 기쁨은 매년 기다림으로만 끝나고  좀처럼 느껴볼 수가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중간중간에 배를 따서 맛을 보지만 아직 익지 않아서 떫고 모래알을 씹는 듯하다. ‘며칠 더, 며칠만 더 기다리자’ 하다보면 주렁주렁 달린 배가 하룻밤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린다. 처음엔 누가 와서 실례(?) 했나?라고 생각도 했지만 범인은 다람쥐였다. 여기저기 한입씩 베어 먹고 버려진 상처난 배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다. 배가 익지 않았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더니 단 맛이 나기 시작하니 하룻밤 사이에 싹쓸이를 한 것이다. 주변의 모든 다람쥐가 단합대회를 갖고 동시에 공격 개시를 한 모양이다.  다람쥐코가 사람코보다 훨씬 민감하다는 걸 새삼 배웠다. 나에게 고향의 맛을 선사하려고 배가 익기만 기다리던  남편은 너무 실망해 펄쩍펄쩍 뛴다. 동물잡는 상자(animal trap cage)를 부랴부랴 나무 주위에 내다 놓지만 이제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격이고 비비건(BB gun)을 찾아 들고 범인을 기다려 보지만 그 일은 사과나무 밑에서 사과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아예 열매가 안 열리면 수확도 기다리지 않는데 풍성하게 눈 앞에 달려있던 모습이 삼삼한데 하루 사이에 그걸 잃으니 여간 약이 오르지 않는다. 수확물은 자연과 함께 나눠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남편을 달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배의 달작지근한 맛이나 블루베리의 톡 터지는 상큼함이 무척 아쉽다.


 세살 아이 주먹만한 배를 이리저리 굴려보며 기쁨의 감탄을 한다. 어찌 이리 둥글둥글하고 야무지게 생겼는 지 손 안에 꼭 쥐어보니 아기처럼 찰싹 안긴다. 이제껏 배꽃의 아름다움만  10여 년 찬사하다가 드디어 작년에 그 열매를 손 안에 들게 된 것이다. 작년에도 배는 많이 열렸으나 맛을 보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과일이  단 맛이 들 무렵 어느 저녁에 또 무법의 침입자가 들이 닥치리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일의 크기가 서서히 커지고 시기적으로 수확을 해도 될 때까지 열매는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이 무슨 일인가? 그즈음은 아침에 일어나면 뒷마당의 배나무와 눈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작년에는 거의 50여 개의 배를 바구니에 담으며 뿌듯한 농부의 마음을 어슴프레 느낄 수 있었다.


 수확의 기쁨 속에 지인들과 오랫만에 뒷마당의 배를 나누면서도 궁금증을 떨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는가?  하늘에서 내리는 비 외에는 다른 비료를 주지 않으니 예년과 다른 변수가 있을 수가 없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별다른 점이 없는데 다른 점을 억지로 찾아낸다면 집 주위에 돌아다니는 다람쥐가 줄어든 것 같았다. 다람쥐 단합대회에 참가수가 미달하여  배나무 공격이 취소 되었을까?  왜 다람쥐의 숫자가 줄었을까?


 얼마 전부터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여우에게 밥상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동물들의 생활 반경에 자꾸 깊숙이 밀고 들어가는 사람들과 공존할 수 밖에 없게 된 여우가 불쌍하고, 어릴 적 엄마의 여우목도리를 가지고 놀면서 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학대(?)했던 미안함에서 시작한 나만의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여우가 포식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식당에서 고기를 먹는 날이면 얻어 오는 뼈마디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때 준비하여 먹고 남은 고기 일부가 고작이다. 남편과 나는 집 주위를 하루에 한 번씩은 먹이가 있는 지 휙 둘러보고 가는 여우의 존재와 다람쥐의 연관성에 생각이 멈췄다. 특히 여우 밥상이 바로 배나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이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여우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배나무 밑에 오줌으로 마크를 해 놓는 걸 본 적이 있었고 다람쥐가 여우의 냄새를 맡기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으리라는 추리(?)를 내렸다.  100 퍼센트 증거는 없지만 여우의 존재가 다람쥐를 위협하게 되었고 다람쥐가 거처를 옮기니 우린 맛있는 배를 지인들과 나눠 먹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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