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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0일

  청년실업 


                                 김미원



눈을 감은 채 긴 숨으로 아침을 맞는다

오늘도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불안에, 서둘러 컴퓨터를 켠다

몸의 온 세포는 전화기에 쏠리고

울리는 건 주책없는

끼니때라고

배에서 나는 망할 놈의 소리


민망한 낮이 슬며시 지났다


죄 없는 공기에 거친 숨으로 속내를 보이고

수심 찬 얼굴 위로 노을이 들 때

주책없는 배는

또 끼니때라고

부끄럼 없이 그 망할 소리를 낸다


보잘것없는 경력이 부끄러워

정성 다해 만든 이력서를 보내고 나면

어느덧

할 일 없던

하루가 서럽게 지나간다


속절없이 하루의 끝이 보일 때쯤


어머니의 인기척에

잠든 척 등을 돌리고 코를 곤다

나의 손을

나의 산 같은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잘 될 놈,

잘 될 놈

그녀 또한 혼잣말인 척한다


(미주한국일보 시 입상작)

최종 수정일: 2024년 4월 10일

코이(koi)의 법칙

                                                            김미원

                                                                 

  코이라고 불리는 비단잉어는 잉엇과의 물고기로 색이 화려해서 주로 관상어로 키우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 그 물고기를 집에서 작은 어항으로 키우면 5cm~7cm까지 자라고   수족관이나 연못처럼 큰 공간이면 30cm 미터 이내로 자라며, 커다란 호수나 바다처럼 넓은 공간에선 1m 안팎까지 자란다고 한다. 코이처럼 처한 환경에 따라 성장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해서 이것을 코이(koi)의 법칙이라 부른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남자아이처럼 자랐다. 소꿉놀이보다 남자아이 놀이인 전쟁놀이, 딱지치기, 구슬치기 그리고 불꽃놀이 하는 걸 좋아했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종일 비를 맞으며 놀기 좋아했고 무지개 끝에 있을 선녀를 보기 위해 무지개를 좇아가느라 길을 잃은 적도 많았다. 그러던 내가 중학생이 되어 치마라는 것을 입는 일이 생긴 후 변화가 생겼다. 여학생만 있는 것도 신기했고. 학교 도서관엔 오빠들이 보는 책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많은 책에 더 놀랐다. 나는 수업이 마치면 책은 많으나 자리가 부족해서 늘 부족한 도서관으로 조마조마하면서 달려가야 했다.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그 순간이 정말 기뻤다. 그곳은 집에는 없는 나만의 독방이고, 나만의 책상이 있고, 나만의 책들 같아 매일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책 읽기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책을 읽은 만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아이로 커갔다. 처음엔 친구들의 고민에서 동네 언니들의 묵직한 고민까지 들어주다 보니 내가 읽는 책의 폭도 넓고 깊어져 갔다. 나에게 사춘기는 너무 평범한 애들 짓거리처럼 보였으며, 그로 인해 세상 물정도 일찍 알아버렸다.

내가 책을 좋아한 이유엔 나의 잦은 병치레도 있다. 나는 큰 지병은 없는데 자주 아팠고 그중 천식이 제일 심했다. 잦은 기침으로 수업에 방해되지 않으려 복도에서 간호실에서 운동장 벤치에서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공기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맘껏 기침했고, 맘껏 아팠으며 맘껏 하늘을 봤다. 교과서 대신 소설책으로 홀로 지내는 시간을 덤덤히 받아드렸던 그때 책은 다행히도 나를 고독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때의 엄청난 독서량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대목이 많은 것도 아니며 이해 못 하면서도 읽은 것도 많다. 그때 난 명작을 읽었다는 뿌듯함과 좋은 책을 붙들고 있는 나를 대견해 했던 것 같다. 아직도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도서관을 많이 다녔는데 그곳에서는 기침으로 자리를 비운 적이 별로 없다.

  얼마 전 30년 넘게 쓴 일기장을 컴퓨터에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편지지보다 긴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제목이 “내가 하고 싶은 일 100가지”라고 적힌 일종의 버킷 리스트인 그것을 언제쯤 적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파리에 있는 에펠탑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고 싶다는 오글거리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20대 초쯤 아닐까 추측한다. 리스트에 있는 100가지 중엔 이루지 못한 것이 더 많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다. 그 내용엔 내가 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는 것이 보여 우선 반갑고 기운이 났다. 그 애씀의 원동력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했던 무작정 읽었던 책 속의 글들이 나에게 심어준 기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슴아이 같던 어린 시절은 나에겐 어항 속이고, 아팠기에 만난 책들은 나에게 수족관일 것이다. 그리고 쥐뿔도 없으면서 아직도 꿈을 꾸는 나의 지금이 바닷속이면 좋겠다고, 그 바닷속에서 아름다운 비단 빛을 뽐내는 나 자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다.  (2018.8.26)

 

 

 

최종 수정일: 2024년 5월 7일

시어머니의 90세 생일


김미원

 

시어머니 생일이 내일이다. 그것도 90세 생일이다. 이런 나이가 되면 선물도 의미 없기에 좀 더 의미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 또한 캘리그래퍼이기 전에. 난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로서 의미 있는 하루를 마련하고자 꽤 고심했다. 아이들에겐 한 달 전부터 꼭 집에 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시어머니를 처음 본건 시부모님 없는 결혼식을 올리고 몇 년 지나 미국에 도착해서 봤을 때가 처음이다.


  시어머니가 미국에 거주하기 시작한 건 그녀의 하나뿐인 집에서 손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서 다. 그녀는 지금의 나보다 젊은 50대였다. 생각해 보면 미국에 도착한 이후 그녀에겐 손발 그리고 언어까지 불편했지만, 손주들을 보느라 개인적인 삶을 일찍 포기한 분이다. 지금의 나라면 과연 나 자신을 버리고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을까 생각하면, 아마 난 어머니처럼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90년 전 유복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배 속에 있던 때, 지금의 코로나 같은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중 친척 한 분이 역병에 걸려 아무도 시체를 돌보지 않자, 착하고 어진 그녀의 아버지가 시체를 가마니에 돌돌 말아 지게로 이어 와선 땅에 묻어주는 그 과정에서 같이 병에 걸려 얼마 후 돌아가셨다. 아빠 없이 태어난 갓난아이는 그녀의 친할머니가 데려가고 젊은 어머니는 외가로 가야 했다. 앞날이 창창한 엄마를 걱정한 두 집안의 배려로 엄마하고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의 얼굴을 모른다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또한 부모님의 성함도 정확하게 기억이 없는데도 그들을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1986년도 남편이 있는 미국에 오기 위해 호적등본을 뗀 것이 있어 우연히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보니, 거기엔 시어머니의 본 성이 “이” 씨라는 걸 확인했다. 어머니의 성명은 이 난 영이다. 미국에 이민하러 와 남편 성을 따랐기에 양 씨로 사용했기에 며느리들과 사위 그리고 손주들은 그녀를 양 씨로만 알고 있었고 굳이 그녀의 본 성에 관심이 없었다. 나도 몇 해 전부터 문학에 관한 것은 내 본 성인 김 씨를 사용하니 좋았다. 그녀도 본 성을 내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나와 어머니는 10년을 같이 살았다. 같이 살면서 어머니와 다툼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정을 쏟으면서 살았다. 그녀는 딸의 손주들을 키워 주셨고, 우리와 살면서는 우리 아들 셋을 키우면서 둘째 아들의 자녀까지 봐주셨다. 어머니는 태어나서 시집올 때까지 남의 집에서 사셨으며, 미국에 온 50대부터도 자식의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분이다. 그녀의 삶 덕으로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머니는 모든 자식에게 사랑을 주셨다.


작년에 시아버지가 코로나로 세상을 떠나시고 홀로 사는 어머니에게 의미 있는 생일을 보내고 싶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바심이 났다. 호적등본엔 그녀의 부모님 이름이 한문으로 적혀 있으며 생년월일도 적혀 있다. 나는 캘리그라피로 그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어머니의 주민등록번호까지 화선지로 옮겼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화선지로 쏟아져 먹물이 번지길 여러 번 끝에 나는 생일 플래카드로 만들어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장식했다.


이젠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의 이름과 그녀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부모님 성함을 적으면서 돌아가신 내 부모님이 생각났다. 내가 사랑하는 시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글쟁이고 캘리그래퍼로서 삶의 마지막을 가시기 전에 비록 그녀가 조실부모했을 지어도, 그녀도 귀한 자녀였고, 부모님이 애지중지했으며, 지금도 손자.손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녀에게 받은 사랑과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사랑은 비교할 수가 없다. 그녀의 삶이 헛되지 않았고, 고운 우리 시어머니의 고달프지만, 그것을 묵묵히 견디신 그녀의 삶을 내 자식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에게 받은 것만큼 드리지 못했다.


생일 아침 나는 서툰 운전으로 어머니가 계신 아파트로 갔다. 그녀를 모시고 미장원에 가는 차 안에서 고백했다. “어머니 참 잘 사셨어요 감사합니다” 라고 수줍게 운전하느라 앞을 보면서 말하자 어머니는 “얘는 별말을 다 하네 난 네가 고맙다”라 시며 작년에 시아버지와 좋아하는 치킨집을 가기로 했는데 못 간 것과 기억에 없는 엄마가 참 예뻤다는 그녀의 이모의 말 그리고 어머니처럼 착했던 얼굴도 보지 못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미장원에서 파마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생일 음식을 주문했다. 큰애에겐 치킨을 사 오라 했고, 작은아이에겐 생선찜을, 막내에겐 꽃과 케익크를 부탁했다. 나는 전날에 미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잡채를 했으며 미역국도 끓여놨고 갈비도 재워냈지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나온 음식을 대접해 주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한 아이들과 커다란 풍선과 벽에 걸린 축하 메시지인 생일상을 보자 어머니 수줍게 그러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벽에 걸리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아하셨다.  예상한 것처럼 어머니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먹기로 한 치킨을 보면서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생선찜 그리고 미역국과 잡채를 고루고루 많이 드셨다. 케이크를 자르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벽에 걸린 종이를 읽어줬다.  너희를 키워 주신 할머니 성함은 이 난 영이다. 오래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말한 후 어머니의 부모님 이름을 크게 읽어 드렸다. 어머니도 잘 기억 못하는 이름을 불러주자 어머닌 놀라시면서 좋아하셨다. “맞다 맞아 우리 엄마 이름이고 우리 아빠 이름이네…”

 

나는 잠자기 위해 어머니와 한 침대에 누웠다. 겉옷을 벗자 속옷이 보이는데 여름옷을 입고 계셨다. 나는 내 옷장에서 사이즈가 넉넉한 옷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정신없는 가방도 내가 갖고 있던 가방으로 교체한 후 정리하자. 어머니 “넌 뭘 날마다 이렇게 날 주냐?”면서도 내가 입어 보시라고 하면 잘 입으셨다. 어머니와 한 침대에서 잠이 들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친정엄마가 살아 계실 때 같이 잤을 때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났다. 친정 엄마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어머니는 꼭 친정 엄마 같다.

 

맥도널드에서 돌아가신 아버님과 자주 갔었는데 라는 말이 생각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딸이 다니는 교회에 어머니를 모셔다드리기 전 나는 서둘러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메뉴를 먹었다. 나는 커피를 어머니는 음료수를 먹었다. 이젠 어머니를 모셔다드릴 시간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이라 차가 없는데도 운전 못하는 내가 걱정이 돼 신지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다. 어제 오셨을 때의 모습보다 오늘 아침의 어머니 모습은 더 이쁘고 얼굴도 맑았다. 그 이유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벽에 걸린 생일 플래카드를 갖고 가면 안 되냐고 물으셨다. 난 이미 그것을 어머니 드리려고 포장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당신 부모님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플래카드를 가슴으로 가져가셨다. 부모님의 유품을 안듯 그것을 당신 집에 갖고 가서 걸고 싶다고….

 

어머니 나에게 제일 좋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고 정말 고맙다며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가끔 어머니와 전화 통화 한때면 사랑한다고 표현하면 어머니도 하시곤 했지만, 면전에서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고 받다 보니 교회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미장원 가는 날이 되면 또 시간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발걸음이 빨랐다. 아마도 딸에게 당신 부모님의 이름을 알았다는, 그 유품 같은 것을 딸에게 자랑하고 싶은 들뜬 마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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