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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서리가 올 것 같아

마지막 남아있던 고춧대를 뽑아

마디 째 대충 훑어 바구니에 담아

뒷마당 햇살 아래 앉았다


설렘을 심던 봄

애써 가꾸던 여름

모든 것 마무리하는 가을


소슬한 바람 아래 고춧잎 다듬으며

가을걷이, 마음걷이를 한다


행복한 기억은 바구니에 담고

아픈 기억은 떼어버린다

아쉬움과 후회는 밭에 묻어

내년 봄에 좋은 거름으로 써야지


매콤한 고춧잎은 초고추장에 무쳐

선물처럼 음미해야지


뒤돌아보니 저 멀리 달음질쳐버린 세월

아쉽지만, 많이 고마웠던 시간


새봄을 꿈꾸며 마무리하는

뿌듯한 가을걷이, 마음걷이




______워싱턴문학 28호, 2025

 
 
 

고장 난 밥통

권향옥


부엌 귀퉁이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고장 난 밥통

벌써 엿새째 저러고 있다

십수 년 전

옅은 미색 예쁜 자태로 우리 집에 처음 와서

완두콩밥 강낭콩밥 현미밥 번갈아 가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묵묵히 따스한 밥 지어 먹이며

무한한 사랑을 나눠주던 너

어느 날부터

푹 푸욱 깊은 한숨 뿜으며 고뇌도 하고

삑 삐익 못 견디겠다고 고함도 지르며

막힌 숨구멍에 답답해 눈물도 흘리고

생쌀을 보이며 데모하더니

드디어 조용히 멈춰버렸다

분신처럼 함께한 긴 세월

고장 난 너를 버릴 수 없어

나는 아직도 구석에 너를 간직하고 있다



매일 버리라고 성화하는 남편

그러나 오늘도 주저하는 나

매일 아침 약으로 하루를 여는 내게

오늘 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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