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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살 때 부터 계간 시문학지 <포엠포엠> 에 에세이를 실었습니다. 올해 여름호 글을 쓰는데 전쟁과 종교를 제재로 삼는 바람에 선뜻 마무리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2022년 여름호에 쓴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그때는 저의 정서가 더 안정되고 행복했나봅니다. 아, 평화여, 어서 오너라!**














초록 엄지(Green Thumb)

-식물을 잘 키우는 타고난 재능


집이 갖고 싶다고 꿈 꿨던 적은 없다. 사회초년생 시절 대학선배랑 들렀던 인사동사주카페의 어둑한 조명 아래서 한자와 한글을 휘갈겨 쓰며 점쟁이가 말했다. 팔자에 집이 있어, 다만 투기는 하면 안 돼. 중학교 때 젊고 열정적인 사회선생님께도 배웠다. 내집마련을 인생목표마냥 악착같이 돈 모으기에만 급급하여 삶을 즐기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한국인들뿐이라고. 하지만 그리 뽐내며 말하기에 세상은 너무 각박하다. 불안정한 부동산 시세와 팬데믹 탓에 집이란 얼마나 하늘같은 존재가 되었나.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영혼이라도 끌어 모아 집을 샀어야’ ⁕하는 후회로 땅을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손 쓸 재간 없는 현실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에겐 언제나 더 큰 꿈이 있었다는 것!


나는 땅이 갖고 싶었다. 너무 크지는 않게, 도시보다는 시골에.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릴 땅, 삽으로 이랑을 내고 거름을 주고 빛을 뿌려 그늘을 드리울 땅 품기를 언제나 소원했다. 나는 땅이 좋고 흙이 좋다. 잘 빗질된 흙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꽉 차오르며 심장이 메아리친다. 발가벗은 갓난아기를 품어 젖이 돌 듯 내 손길을 기다리는 흙을 매만지고 싶어진다. 간혹 공사장을 지날 때 편편히 다져놓은 붉은 흙을 보기만 해도 몰래 들어가 양파 모종 한 줄이라도 심어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촌스러움은 쉬이 벗겨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관과 결혼을 했더니 미국이 아닌 타국에 살 땐 정부에서 집을 준다. 그러니 그 옛날 점쟁이 말 대로 살 집 걱정은 없다. 다만 내 집이 아니고 정원사들이 주변을 관리하니 ‘내 땅’ 돌보는 재미는 덜하다. 미국 본부에 돌아와서야 돈 들여 살 집을 구하는데 첫 아이가 태어난 워싱턴디시의 타운하우스가 8년 전 첫 미국살림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다. 월세를 내고 살았던 DC의 신혼집은 집주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잉글리쉬베이스먼트’인데 우리식 반지하에 가까운 구조의 집이었다. 방 한 칸에 거실 겸 부엌 한 칸이 전부였고 낮에도 전등을 켜야 활동이 원만했다. 좁고 어두운 도시의 방 한 칸이었지만, 집주인이 뭐든지 마음대로 심고 가꿔도 된다고 허락한 손바닥만한 화단 한 칸이 있어 나는 풍성한 도시의 추억을 수확했다. 이사한 이듬해 집 앞 정원은 깻잎, 고추밭으로, 좁은 뒤뜰은 허브가든으로 변신했다.


아들 둘로 식구를 불려 미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도시를 벗어나 정원이 있는 교외로 이사했다. 베데스다의 우드헤이븐이란 곳인데 동화 속 소녀가 금방이라도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것 같은 고풍스런 저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그 중 우리는 소박하고 실용적인 집을 골랐다. 등변사다리꼴의 부지에 얌전히 앉은 콜로니얼양식의 벽돌집이다. 집 뒤로 울창한 숲이 있어 뒤뜰에 앉아 있으면 삼림욕 부럽지 않은 숲 향이 전해온다. 그리고 집을 사기 전부터 내 눈에 쏙 들어온 미래의 내 텃밭. 집을 보러왔는데 뒤뜰 문으로 이어지는 담벼락 아래에 잔디와 마른 흙이 엉긴 빈 땅 한 줌이 오후의 햇볕아래 오수를 즐기듯 무방비로 누워있는 게 아닌가. 내 눈에만 보이는 보석을 발견한 기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메릴랜드에서 집과 함께 사계절을 샀다. 여름엔 잡초보다 잘 자라는 잔디를 제때에 깎아주느라 매 주말 부지런을 떨었고, 늦가을 들어선 낙엽 지는 정원을 갈퀴로 쓸어내느라 매일 오후가 바빴다. 과연 힘에 부치는 노동이라 아들 둘 고사리 손까지 보태 낙엽정리를 하곤 했다. 하지만 텃밭은 오롯이 나의 놀이터다. 쟁기를 빌려서 이랑을 만들었고 한파에도 잘 견디는 민트와 로즈마리를 먼저 심어두었다. 날이 완전히 풀리자 분갈이용 화분을 종류별로 늘어놓고 빈 이랑을 살피며 그저 흐뭇해하는 중이다. 맨 앞줄에는 부추와 쪽파를 심고, 고추와 깻잎은 널찍한 곳으로 심고, 타임, 오레가노, 방아풀도 잊지 않고 심어두어야지. 바질 씨앗을 종류별로 사 놓고 태국바질이 듬뿍 들어간 더운 국수를 후루룩거릴 생각에 벌써 군침을 삼킨다. 마흔 살이 되었고 가꿀 땅을 손에 넣어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늦게 한 결혼도 아니었는데 아직도 내 손 거치지 않고는 잠들러가지 않으려는 아들이 있다는 게 신비롭다. 삶의 이랑을 일구느라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가꾸고 키우는 일은 이제야 시작이라니. 올바로 키워내기란 또 오죽 힘든 일인가. 수확을 바라지 않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 자식농사란 말을 들은 것도 같다. 호미 하나로 드넓은 들판을 마주한 팥죽할머니라면 이리 애태우지는 않으시겠지. 겨울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의 고랑은 꼭 매야했기에 더운 여름 할머니는 꿋꿋이 호미질을 하셨다. 나는 팥죽할머니가 되기로 하자. 삶이란 호미가 지나는 흙이란 생각이 든다. 호미질에 걸리는 돌이며 잡풀의 뿌리란 생각이 든다.




*이현승 시인 시 <자각 증상>에서_ 『대답이고 부탁인 말』,



 글로벌포엠포엠 메릴랜드이야기

2022년 여름호

정혜선














무덤자리는 고스란히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

부제: 이현애, 지명희, 한성미

 

친애하는 당신, 안녕하세요? 이현애, 지명희, 한성미 님.

미국에 와서야 처음 만나본 내 북녘 동포입니다. 안녕이란 말로 당신에게 인사를 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난 당신이 정말로 안녕했으면 합니다.

 

워싱턴 D.C. 국회 캐피털 힐의 회의장에서 당신들은 북한의 여성에 대해, 그리고 인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목숨 걸고 떠나온 길이었기에 탈북에 실패할 때마다, 혹은 어떠한 이유로든―타당성은 차치하고― 보위사령부에 체포되고 재산을 압수당할 때마다 어김없이 처박혀야 했던 감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고문과 매질의 나날을 힘겹게 언어로 옮겨낸 용기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무릎 꿇거나 기마자세로 꼼짝 못하게 벌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시에는 모욕적인 욕설을 들으며 매를 맞았지요. 화장실 없는 감옥소 안에서 방 마다 고무 통 하나에 대소변을 해결하고, 가득 찰 때까지 변기를 비우지 못하게 하는 저질의 괴롭힘이 만연한 곳. 어느 날은 소변만 허락한다며 대변 보는 이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일까지 있었지요. 현실을 노골적으로 증언하자면 토악질나는 언어들을 발음해야 하는데, 스스로 제 입을 더럽히는 치욕을 다시 한번 무릅쓰고 미국 D.C.의 청중을 향해 당신들은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삶이지만 아직 저 안에 사람이 있다고. 구하지 않으면 압사당하고 침몰해버릴 무고한 북한의 보통사람들을 제발 도와 달라고. 우연히 들어온 듯한 국회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당신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이 되어 눈물 흘렸습니다.

 

북한에선 ‘인권’이란 말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사람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한 권리가 있다는 진실이 북한 내에서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당당하게 개인이 사회 구성원들과 조화할 수 있어야 하는 권리가 오직 북한의 체제유지를 위해서만 악용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소중하다’ vs ‘김정은 동지를 위해서는 고난도 슬픔도 행복이다’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 된 후 교화소로 끌려간 당신은 나체로 온몸 수색을 받았습니다. 숨긴 돈이 있는지 찾기 위해 위생장갑도 끼지 않은 손가락이 질 속까지 뒤졌습니다. 재판도 없이 예고없이 처형되기 일쑤인 그곳에서 ―뇌물이 없었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 그녀가 3년형을 살고 풀려나온 날, 근처 역사에 걸린 큰 팻말에 ‘김정은 동지를 위해서는 고난도 슬픔도 행복이다’ 적힌 글을 보고 극심한 구역질과 분노에 몸서리친 그때를 당신은 고백했지요. 교화소에서 나오는 너무 많은 시체는 처치곤란으로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히는 데, 그 무덤자리는 고스란히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 매년 알이 꽉 찬 옥수수를 키워낸다는 말을 덧붙이는 당신의 눈동자가 추수 끝난 벌판처럼 공허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아요, 우리! 분단된 세월이 길다고는 하나 우리는 한 민족이며 통일되어 함께 살아야 할 한 가족입니다. 태평양 건너에서 조국을 멀리 두고 살다 보면 어디서 한국말만 들려도 내 피붙이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한반도 안에서 일어나는 기쁜 일에는 뿌듯함이 풍선처럼 부풀고, 끔찍한 사건사고 소식엔 마치 내 친지에게 일이 생긴 것 같이 발을 동동 구릅니다. 닿을 수 없기에 더욱 그립고 안타까운 내 가족들의 이야기, 이것이 북한 동포들을 향한 저의 마음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신 당신, 감사합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마을에서 오늘도 위태로운 외줄에 선 우리 동포들의 손을 잡아 주도록, 세계의 눈이 한번 더 그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목소리에 메아리를 보탭니다.

 

당신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며,

정혜선 드림

 

 



정혜선


한산섬 달은 밝았을 거야

긴 허리끈 풀고 앉아 깊은 시름할 적에

문 틈에 불어오는 여린 바람에도 파르르 함께 떨던 나

맨몸에 감은 흰 옷 풀어 당신의 비밀 훔쳐주었지

 

말해 주고 싶었어

당신 혼자 그리 끙끙댈 일 아닐 거라고

세상 등지고 문 걸어 잠그는 일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화장지가 풀어지고 응시의 봉합선이 뜯어지는 순간 당신은 잊겠지만 말이야

 

달고 쓰고 구린 일상의 밀도 속에 나를 낭비하는 곳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붙어 들락거리는 엉덩이에 맞장구 치며 사는데

인간들이 말하는 인생의 웬만한 맛 나도 맛보지 않았겠어?


소요에서 적막을 길어 올리고

울음에서 울음 이후를 분리해 내는

들어서는 일과 나아가는 일 사이의 일주문에

생과 죽음이 걸리기도 한다는 걸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가 되어준 적 있어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 있어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랬어

적막이 머무는 자리 오래 돌아보았기를

하루에 수 백 번 문은 닫히지만 묵언의 한 칸은 영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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