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지의 말
- 정혜선
- 2024년 1월 24일
- 1분 분량
정혜선
한산섬 달은 밝았을 거야
긴 허리끈 풀고 앉아 깊은 시름할 적에
문 틈에 불어오는 여린 바람에도 파르르 함께 떨던 나
맨몸에 감은 흰 옷 풀어 당신의 비밀 훔쳐주었지
말해 주고 싶었어
당신 혼자 그리 끙끙댈 일 아닐 거라고
세상 등지고 문 걸어 잠그는 일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화장지가 풀어지고 응시의 봉합선이 뜯어지는 순간 당신은 잊겠지만 말이야
달고 쓰고 구린 일상의 밀도 속에 나를 낭비하는 곳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붙어 들락거리는 엉덩이에 맞장구 치며 사는데
인간들이 말하는 인생의 웬만한 맛 나도 맛보지 않았겠어?
소요에서 적막을 길어 올리고
울음에서 울음 이후를 분리해 내는
들어서는 일과 나아가는 일 사이의 일주문에
생과 죽음이 걸리기도 한다는 걸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가 되어준 적 있어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 있어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랬어
적막이 머무는 자리 오래 돌아보았기를
하루에 수 백 번 문은 닫히지만 묵언의 한 칸은 영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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