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화장지의 말



정혜선


한산섬 달은 밝았을 거야

긴 허리끈 풀고 앉아 깊은 시름할 적에

문 틈에 불어오는 여린 바람에도 파르르 함께 떨던 나

맨몸에 감은 흰 옷 풀어 당신의 비밀 훔쳐주었지

 

말해 주고 싶었어

당신 혼자 그리 끙끙댈 일 아닐 거라고

세상 등지고 문 걸어 잠그는 일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화장지가 풀어지고 응시의 봉합선이 뜯어지는 순간 당신은 잊겠지만 말이야

 

달고 쓰고 구린 일상의 밀도 속에 나를 낭비하는 곳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붙어 들락거리는 엉덩이에 맞장구 치며 사는데

인간들이 말하는 인생의 웬만한 맛 나도 맛보지 않았겠어?


소요에서 적막을 길어 올리고

울음에서 울음 이후를 분리해 내는

들어서는 일과 나아가는 일 사이의 일주문에

생과 죽음이 걸리기도 한다는 걸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가 되어준 적 있어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 있어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랬어

적막이 머무는 자리 오래 돌아보았기를

하루에 수 백 번 문은 닫히지만 묵언의 한 칸은 영원하지 않아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시를 내놓으며

<시를 내놓으며> 이슬람 세밀화를 좋아한다. 절대자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투시하는 평면 구조이면서 식물, 사람, 동물 등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원근에 상관없이 극도로 작고 세밀한 필체로 그려내는 것이 이슬람 세밀화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Comments


워싱턴문인회 로고_edited.jp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