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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내놓으며

<시를 내놓으며>

이슬람 세밀화를 좋아한다. 절대자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투시하는 평면 구조이면서 식물, 사람, 동물 등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원근에 상관없이 극도로 작고 세밀한 필체로 그려내는 것이 이슬람 세밀화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권위적일 것 같은 신의 시점을 그림을 마주하는 개인의 시선 위로 끌어와 포개어 버리는 마법을 부린다. 오래 들여다볼수록 구석구석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묘미!

오르한 파묵이 쓴 『내 이름은 빨강』은 단연 이슬람 문화와 회화에 대한 상식을 세계에 전파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킨 대표 소설일 것인데, 금박 세공사가 세밀한 그림 작업으로 시력이 약해져서 끝내 눈이 머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내리는 저녁 빛을 마지막 붓놀림에 새겨 넣는 거룩한 작업에 대한 묘사는 가히 경이롭다. 오늘 어스름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그가 물드는 마지막 저녁일 지도 모르는데, 신이 내리는 선물인 양 황홀하게 어두워간다. 인간의 시야에선 점점 흐려지지만,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뚜렷이 존재하는 어떤 것을 화가는 보고 있으리.

시를 바라 맹목의 삶을 살겠다고 맹세한 적은 없지만 우주가 (혹은 신이) 그러하듯 시는 있었다. 먹고사는 일을 이유로 몇 번쯤 국경을 넘으며 사는 삶이지만 해석되지 않는 이국의 언어에 부딪힐 때마다, 간파할 수 없는 제스처에 둘러싸여 낭자한 고립감에 괴로워할 때마다 말 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다. 곧은 길과 바람과 푸른 하늘을 바랐고, 시를 바랐다. 언어라는 걸림돌이 아닌, 내 마음에 무언가를 움직여 줄 작은 조약돌 하나를 소원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조약돌과 나 사이 인연이 맺어지고, 이 인연을 누군가에게 발설하고 싶어지고, 그 표현에 대한 갈망으로 다시 말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때 언어는 침묵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고, 침묵 이후에 찾아오는 안도감의 온도로 저녁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시는 언제나 있다.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헤밍웨이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 사실에 바탕을 둔 가장 진실한 문장으로 그의 글쓰기를 시작한다고 한다. 두렵다. 진실은 어디서 오는가. 사는 세계를 거듭 바꾸며 살다 보면 경험과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뒤섞일 때도 있으니까. 우리의 삶을 통째로 투시해서 그린 세밀화가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부분은 겨우 거대한 상자 안 칸막이의 한구석이다. 조명이 옮겨질 때마다 진실과 진실이라고 믿는 것 사이에 모호한 어스름이 일어나고, 저녁이 가고 밤을 지나 내일을 불러오듯 영속의 경계선은 끝이 없다. 그러니 계속 질주할 밖에 도리가 없다.

*본 글에는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음을 밝혀 둡니다.



누가 저녁을 불러냈나요?


정혜선

저녁은 벌써 가고 없군요

신던 양말을 소파 밑에 벗어 놓고

기름 낀 하루를 구정물에 불려 놓은 채

어질러진 식탁 위로 허물어진 저녁은

물의 얼룩만 남기고 갔네요

온종일 나는 저녁 향해 저물었는데

캄캄해진 두 손으로 투항하듯 보듬는 어스름

백지 위로 몰려드는 우두커니를

흘려 써 주길 바라요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에 정신이 팔려서예요

뜨겁게 일어나는 휜 문장을 언뜻 읽어낼 듯도 했는데

냄비 뚜껑을 밀고 올라온 하얀 수증기로 푹푹 마음만 자욱하고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지만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없어요

차를 마신 후 잔에 남는 찻물 자국으로 미래를 읽는 점쟁이가 있어요

어제 집어삼킨 시간을 오늘 토해낸다 해도 쏟아지는 문장은 새것이 아닌데

Where, am, i……

손가락으로 넘는 영속의 국경선

식탁 위엔 또 한 번 물컵이 엎어지고

말갛게 저녁은 가고 없어요

낯설기로 작정한 사람이 되어 물의 질주를 지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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