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쏟아지는 저녁의 언어
- 정혜선
- 2024년 1월 21일
- 1분 분량
폭설 쏟아지는 저녁의 언어/정혜선
1
오후에 또 폭설이 쏟아진다고 한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노숙자들은 도서관이 있어 얼어 죽지 않는다
낮에는 도서관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밤에는 지하철역을 찾아든다
그가 그 한데를 잠자리로 삼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투구벌레처럼 집 한 채를 짊어지고 느릿느릿 걸어간다
사계절 옷가지를 쓸어 담은 검정봉지를 손에 들고
노숙의 성지인 뜨신 김 오르는 지하철역 그의 방고래
개어 놓은 이불을 방석 삼아 앉는다
발밑을 구불구불 쉬지 않고 흘러갈 도시의 흉몽들
거미굴 같은 도시의 내장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귀에 박힌다
2
그때 나는 무척 배가 고팠고 혐오가 한층 위장을 자극했다
하루에도 몇 번을 먹어야 하는 이 짓이 신물 난다
라고 입으로 말할 뻔 했다
그가 봉지를 펼치고 튀긴 닭다리를 꺼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의라도 치르듯 씹기 시작했다
행인들이 바라보거나 말거나 공을 들여서
먹는 행위만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라는 듯 입을 움직였다
음식을 음미하는지 때때로
좌선하는 승려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3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노숙자라고 배고플 리 없겠지만
그는 한참을 굶은 사람 같다
공허를 먹고 혼잣말을 먹고 지하도의 탁한 공기를 마신다
과거의 조각들을 오래오래 씹어 삼키고 다시 게워 내어 또 씹는다
음식을 삼키고 나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입속으로만 중얼거린다
주문이라도 외우는 듯 뜻이 불분명한 영어
겨울 저녁의 지하철역에 그의 먹는 행위만이 클로즈업 된다
4
영어로 말할 때 나는 종종 말을 더듬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언어들
모국어로 치환해도 결국 같은 값이 나오지만
그 끈을 끈질기게 붙잡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의 습성을
실어증의 한없는 무한 재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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